얼마 전에 <비스티보이즈>로 윤계상, 하정우씨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사랑>이 막 개봉하고나서 '배우 하정우'에 대해서 좀 끄적거렸던 기억이 나서 컴퓨터를 뒤져보니 이런 게 튀어나오더군요. 당시에 갑자기 필 받아서 하정우씨 출연작을 순서대로 다시 몰아봤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요. 암튼, 개인적으로 하정우란 배우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건 <마들렌>이었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신민아의 남자친구역으로 잠깐 등장해요)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이는 리액션을 보여주는 배우였던지라 인상적이었는데,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선 매우 반가웠다지요. <두번째 사랑>은 영화도 참 좋았지만 두 배우의 연기가 더 좋았지요. 전 아직도 몇몇 장면에선 숨이 탁, 막히는 감정을 느끼곤 한답니다. 암튼, 이 이후로 <추격자><비스티보이즈>에 이르기까지 멋진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하정우씨가 <멋진 하루>에서 보여줄 연기가 다시 한 번 기대되네요.
하 / 정 / 우
담 백 하 게 비 워 낸 텅 빈 눈 동 자
낯선 땅 위에 외로움과 고독말고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는 남자가 있다. 깊은 고독을 품은 이 검은 눈의 남자에게 파란 눈의 여자가 위험한 거래를 제안해온다. 거부할 수 없는 거래를 받아들이는 이 남자. 어쩌면 그는 아무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낯선 나라에서 누군가와의 소통을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에, 타인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두번째 사랑]의 지하는 배우 하정우아 묘하게 닮아있다.
서성거리는 익숙한 우울함
돌아보면 하정우란 배우는 꽤 오랫동안 커다란 스크린 안을 서성였다. 갈피를 못 잡은 듯한 발걸음이 힘을 받은 건 [용서받지 못한 자]의 태정. 이전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영화 속 그의 존재를 찾기가 힘이 든다. 그만큼 하정우의 서성거림이 관객들에게 낯설게 느껴진 탓이다. [마들렌]이나 [잠복근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서성이는 그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하정우에게 그건 서성임이 아니라 서성임의 시도이다. 영화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교묘하게 가늠하는 배우가 제 짝을 만난 듯, 타인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태정으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태정은 군대라는 울타리에서 교묘하게 서성이는 존재다. 적당히 후임들을 쥐고 흔들 줄 알며 선임들에게 굽신거릴 줄 아는, 하지만 그 안에 그의 자리는 없다. 일부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지 않고 이리저리 서성이는 태정은 주춤거리는 발걸음에서 그리고 흔들리는 눈빛에서 승영을 외면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이미 말이 아닌 몸의 연기를 습득한 이 배우가 태정을 연기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고백하면서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프라하의 연인]의 동남은 태성의 서성임을 이어간다. 대통령의 딸을 묵묵하게 보호하는 보디가드인 동남은 그 옛날 [모래시계]의 재희와 같은 투철한 눈빛이 없다. 그가 보호를 맡은 대통령의 딸은 위험에 노출된 존재가 아니다. 다만 용납이 안 될지도 모르는 사랑에 흔들릴 뿐이다. 그런 그녀를 온 몸을 다 바쳐 보호할 이유가 동남에겐 없다. 하정우는 철저하게 계산된 리액션을 구사한다. 이전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서성였던 그의 리액션은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프라하의 연인]에서는 은근슬쩍 시도된다. 신인의 발견이라며 [용서받지 못한 자]의 태정에게 한껏 손을 치켜들 때 이미 배우 하정우는 그 안에서 자신만의 리액션을 연습 중이었던 것이다.
갖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제 하정우는 연습을 마친 실습생의 자세로 갖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즉, 원하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으므로 배우 하정우가 갖고 싶은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통해서 김기덕을 만나고 [구미호가족]을 통해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그의 행보는 배우 하정우를 훨씬 더 궁금하게 한다. 시간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찾아 헤매는 지우의 얼굴은 사랑에 간절하고 또 존재에 간절하다. 갈기갈기 찢어놓은 김기덕의 시간 속에서 지우는 똑같이 감정을 찢는다. 그러나 그 속에 서성거림은 없다. 흘러간 시간을 견디지 못한 연인을 찾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 정도는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우는 갖고 싶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망설임이 없고, 그건 배우 하정우에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런 헤어스타일에 어딘가 한 박자 모자라는 [구미호가족]의 아들 역을 선뜻 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새롭게 선보이는 뮤지컬 영화에 대한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 그를 춤추고 노래하게 한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펼쳐지는 어색한 쇼에서 그의 동작은 머뭇거리나, 그 머뭇거림은 어색하지 않다. 이 영화에서 하정우는 영리하지 못한 아들의 몸에 딱 맞는 옷을 계산하고 있다. 리액션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그의 몸은 아마도 데뷔 이전에 경험한 연극의 무대에서 습득했을 것이다. 그가 몸을 쓰는 데 자유로운 것이 연극적인 리액션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구미호가족]이다. 그는 동선과 시선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움직인다. 욕심만 가지고는 불가능한 리액션을 이미 연기로 익힌 것이다.
거울을 마주한 고독한 시선
[두번째 사랑]의 지하눈 하정우의 리액션이 정점에 달하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언어의 소통이 불가능한 뉴욕의 한 복판에서 피부색이 전혀 다른 두 인물이 결합하는 과정은 통속적인 전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통속적인 전개 이전에 영화는 두 인물의 얼굴과 몸을 과다하게 클로즈업함으로써 교묘하게 이들의 감정에 동의를 구한다. 이는 분명 두 배우에 대한 감독의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시도이며, 두 배우는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소피와의 관계 후, 침대 밑에 숨겨둔 금고에 백달러짜리 지폐를 집어넣는 지하의 표정은 삶의 당위성을 핑계 삼아 고독에서 벗어난 죄책감이 묻어난다. 한국에 두고 온 여자친구의 사진을 바라보며 정당화되는 위험한 거래는 이미 파국에 달할 그의 사랑을 예감하게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사라지고 ‘사랑’만 남은 [두번째 사랑]의 지하는 ‘사랑’을 위해서 ‘두번째’를 넘어서려 한다. 소피를 위해서 이불을 바꾸고 꽃을 사는 수줍은 표정은 사실 사랑이 아닌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이다. 마치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형수를 찾아가 말문을 여는 [숨]의 주연처럼. 두 영화 사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자리를 오가는 하정우는 거울을 마주한 고독한 시선을 완성한다. 오른손을 가져가면 왼손을 뻗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시간차로 연기하는 그의 눈빛은 한 없이 깊고 어둡다.
마이너의 무대를 독점한 하정우에게 [히트]의 재윤은 분명 새로운 시도다. 드라마의 빠른 속도나 모든 걸 가진 여유로움은 이전의 그에게 어색한 옷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하정우는 그런 의심을 가볍게 벗어던진다. 뉴욕의 고독함을 견딘 그에게 이제 불가능은 없어 보인다. 그는 차근히 배우 하정우의 몸을 만들어 가고 있고, 그런 그의 몸은 스크린 안에서 철저하게 계산된 리액션으로 소화된다. 하정우는 영리한 배우다. 유연하게 자신의 몸을 쓸 줄 아는 이 배우는 이제 배우로서의 고민을 어느 정도 다 털어버린 듯하다. 윤종빈 감독과 다시 만날 [비스티보이즈]가 기대되는 까닭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서성거림은 필요치 않은 탓이다. 이제 배우 하정우는 철저하게 고립된 깊은 외로움을 벗고 담백한 눈빛으로 배우의 매력을 넘어설 지점에까지 도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