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세상을 만나다 _ 1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
뼈 있는 웃음의 맛깔스러움
시대를 초월한 시사 코미디 연극의 고전 해학과 풍자의 멋으로 정치판을 비웃다.
20여 년 동안 시들지 않은 촌철살인의 풍자극 <늘근도둑 이야기>가 오랜만에 대학로를 찾았다. 1989년 초연부터 지금까지 시대상을 반영하는 살아있는 극본으로 소시민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마음껏 정치를 비웃었던 호탕한 무대가 돌아온 것. 소극장에서 단 세 명의 배우만을 가지고 공연되는 이 작품의 매력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대사의 끈끈한 맛과 정치인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시민들의 순박함이다.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권위를 자랑하는 ‘그 분’의 집에서 수십 수억의 미술품들을 눈앞에 두고도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는 두 늙은 도둑의 하룻밤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쉴 틈 없이 뼈 있는 웃음을 선사한다. 사건은 이렇다. 사회에서보다 형무소에서 더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두 늙은 도둑이 특사로 풀려나와 갈 곳도 먹을 것도 없이 거리를 헤매다 몰래 숨어든 곳이 하필 ‘그 분’의 미술관이었던 것. 그저 금고만을 찾아 헤매던 두 늙은 도둑은 결국 체포되어 본청 특수 수사관으로부터 취조를 받게 되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서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정치판의 비리를 쉴 세 없이 고발한다.
대통령 여덟 분을 다 모신 도둑놈이라며 어깃장을 늘어놓는 더 늙은 도둑이 “이승만 때는 미군부대 전문적으로 털어 먹고, 박정희 때는 금고 전문가로 데뷔해가지고 전국 수사기관에서 나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최규하 때는 꿈에 떡 맛보듯 지나가서 내가 제대로 못 모셨고, 전두환 때는 비행기타고 다니면서 전국의 부잣집 금고만 털어 먹었고, 노태우 때 김영삼 때 김대중 때는 쭉 안에 들어가 있었지.”라고 정권을 넘나들며 도둑질한 활약상을 나열할 때면, 관객들은 웃음을 넘어선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한다. 사회 권력층의 세력을 상징하는 미술관에서 횡재를 꿈꾸는 어리숙한 두 늙은 도둑의 모습은 어쩌면 더 이상 넘어설 수 없는 현실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임을 얼핏 내 비치기 때문이다. 절도 전과 18범이라곤 하지만 죄목이라곤 단순 절도, 그것도 대부분 돈 만원어치도 안 되는 수준에 그쳐버린 두 늙은 도둑의 처지는 먹고 사는 것조차 녹록치 않은 소시민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대선이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 대선정국과 맞물려 이번에 공연되는 <늘든도둑 이야기>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 작 년 한해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신정아 사건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미술관과 오버랩 되는 것은 물론 BBK 주가조작사건, 국세청장의 뇌물 사건 등을 새롭게 배치해 놓은 것. 정치인들이 보면 뜨끔할 정도로 대사의 농도는 짙고 그 농도만큼이나 큰 웃음을 자아낸다. 가만 돌아보면 시사코미디는 우리네 삶에 단순한 웃음을 통한 소통을 넘어서 정국을 향한 고발의 기능을 도맡았던 영역이다. 언젠가부터 발 빠르게 변화하는 대중문화의 물결 속에서 그 영역이 희미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시사코미디처럼 우리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준 곳이 어디 또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2003년 대선 이후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늘근도둑 이야기>은 기존의 레퍼토리보단 좀 더 따뜻하고 흥겨운 웃음이 넘실거린다. 이제는 시사코미디가 익숙지 않은 관객들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병들어버린 정치판의 허위와 위선, 우상을 파괴했던 지난 시절과 똑같은 무대를 기대하기엔 벌써 많은 시간이 흐르고 또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하지만 “날이 무뎌졌다고 칼이 가지는 기능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확언한 연출의 변처럼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조금도 늙지 않고 펄펄하게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쉰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이 변했을지언정 먹고 살기 위해서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소시민의 삶은 지금도 여전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치열함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있기에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뼈 있는 웃음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대학로에서 이렇듯 가슴이 묵직해지는 웃음을 나누는 일이 너무나 어려워졌다. 매일 매일 수많은 공연 포스터가 덧붙여지지만 막상 그 속에서 좋은 작품을 만나기는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워지고 있다. 자꾸만 가벼운 웃음만을 추구하다보니 시시한 말장난 한 번에 자지러지는 개그 공연이 대학로를 장악하고 있다. 가벼운 웃음, 화려한 볼거리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진중한 메시지를 놓친 채 자꾸만 눈 먼 무대만 찾는 것 같아 아쉽다. 연극은 단순한 여가 생활의 영역으로 묶어 놓기엔 너무나 치열하게 인간의 삶을 고민해 온 영역이다. 태생 자체가 인간이 가진 모든 감정의 영역을 자유롭게 쥐고 흔들며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 곳이다. 다시 말 해 연극을 통해서 얻는 웃음은 단순히 우리의 즉흥적인 감정이 아닌, 우리의 삶 속에서 쌓여온 기억이 담긴 웃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늘근도둑 이야기>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200석 남짓한 소극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배우들과 주고받는 웃음은 단순한 우스움의 수준을 넘어서 삶이 녹아든 풍자와 해학을 바탕에 둔다. 실컷 웃다가 극장을 나서면서 느껴지는 후련함은 퍽퍽한 일상에 분명 큰 위로가 될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의 가려운 곳만 긁고 지나가기에 이 무대가 담은 웃음이 너무 걸쭉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막 새로운 정부 세우기에 여념 없는 정치인들이여, 아무리 바쁘더라도 크게 한 번 웃고 시작하는 건 어떨지. 뼈 있는 웃음을 즐기다보면 어느 순간 뜨끔하고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있을 테니 말이다.
<무비위크> 이유진 기자